Jihyun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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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Jihyun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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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점으로 남은 존재의 얼룩
송수정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정책연구과장


동화를 읽다 보면 삐딱하게 볼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꾀부리지 말고 매사에 성실할 것을 가르치는 교과서 같은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도 예외는 아니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무시한 채 지푸라기와 나무로 집을 지은 두 형은 여우에게 잡아먹히고 벽돌집을 지은 막내만 무사히 살아남는다.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린 성실함과 별개로 <아기 돼지 삼형제>는 초가집과 나무집을 나태함과 불안전함의 상징처럼 묘사하는 상당히 반환경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만큼 우리 사회의 주거 정책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도 드물다. 특히 이 동화의 표면적 교훈인 튼튼한 벽돌집 판타지는 이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시골에서는 초가지붕 대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고, 도시에서는 판자촌을 밀어내고 양옥집이 들어섰다. 특히 성실함과 경제 발전에 대한 신화는 더 맹목적이어서 수도권에서는 1970년대 이후 벽돌보다도 튼튼한 콘크리트 아파트가 민들레 홀씨처럼 번식해 나갔다.

동화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벽돌보다 더 튼튼한 콘크리트 집마저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단단한 건물도 여우가 뿜어내는 바람은 막아 낼지언정 재개발의 바람을 막아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성실함은 곧 경제력을 의미하고 집은 경제력을 위한 중요한 재테크 수단인 사회에서, 거꾸로 집을 통해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성실하지 못함을 의미해 왔다. 결국 개발과 투자라는 명목이 수십 년은 끄떡없을 집들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

새마을운동의 농촌 근대화부터 88올림픽의 도시 정화, 2000년대의 뉴타운 건설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를 관통하는 주택 재개발의 역사는 의외로 쉴 틈 없이 일어났고, 재개발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일 수밖에 없어졌다. 전형적인 강남 아파트 키즈인 작가 정지현도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5층짜리 잠실 아파트가 30층짜리 고층 아파트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스무 살이 된 때고, 아파트는 지은 지 채 30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아파트는 완공 당시만 해도 단지 안에 병원이며 학교가 들어선 최초의 뉴타운이었다.

그에게 이 사건은 꽤 충격이었는데, 그간의 추억이 오롯이 깃든 공간들이 90퍼센트 넘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던 놀이터며 학교와 집 사이에서 들락거리던 아지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그의 집은 개발 논리로만 보자면 잠실 몇 단지로 구획된 아파트 상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생의 자궁으로서의 집이었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가 말하듯이 우리의 경험과 기억이 서린 모든 사물, 대상, 터전을 ‘기억의 장소’라고 부른다면, 정지현은 탄생과 성장 과정을 함께 한 집이라는 기억의 장소를 통째로 잃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 시대 재개발의 허상과 파괴력을 둘러싼 심각한 고민을 던지지는 않는다. 주택과 집의 차이, 다시 말해 상품이 돼 버린 사물과 기억의 장소인 집의 차이를 찾기 위해 섬세한 감각을 열어 둘 뿐이다. 그렇기에 재개발이 예정된 버려진 단지에 눈길이 멈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오랫동안 방치된 그 침묵의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에 이끌렸다. 어쩌면 이제 곧 소멸할 공간이 머금은 과거의 기억과 흔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개발 지역의 빈 공간이 기억을 품은 방식은 몹시 남루하다. 낡은 벽지 위의 연도를 알 수 없는 낙서이거나 손잡이 주변으로 새까맣게 얼룩진 손때 혹은 욕실 바닥에 나뒹구는 헌 칫솔 따위만이 과거의 흔적을 대신할 뿐이다. 버려진 사진 액자며 장난감들은 쓰레기와 함께 뒹굴면서 생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화려한 나날을 꿈꾸며 발랐을 꽃무늬 벽지에는 곰팡이가 피고, 벽지가 뜯겨 나간 천장과 바닥에는 더 이상 감출 게 없는 맨살처럼 퇴색한 콘크리트만이 차갑게 빛을 발한다. 이 공간에 머물던 사람과 그 사람들을 품어 준 공간의 자취들은 이처럼 덧없을 뿐이다. 작가가 재개발 현장에서 맞닥뜨린 것은 이런 삶의 왜소함이었다. 희미하고 자그마한 흔적들은 무기력하기도 해서 단 하루 만에 혹은 불과 며칠 만에 폭파된 건물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건물의 수명이 얼마가 되었든, 그곳에 머물던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이었든 다이너마이트로 순식간에 날려 버리는 철거 현장의 날렵함은 무섭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 속도와 규모, 소리야말로 스펙터클의 진수를 보여 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스펙터클한 폭력에 맞서는 작가의 방식이 아날로그적이고 일차적인 단순함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재개발이 무분별하게 번지면서 재개발 현장을 사진으로 담는 작업 또한 유행처럼 퍼졌는데, 보통은 따뜻하고 서정적으로 존재의 흔적을 포착하거나, 차갑고 중립적으로 폐허가 된 공간을 과감 없이 드러내는 식이었다. 그러나 정지현은 이제 곧 붕괴할 건물이 지닌 아우라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생의 흔적을 대비시켜 보여 주는 방식을 깨끗이 포기한다. 어쩌면 시각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철거 중인 건물에 무단침입을 하듯이 들어가 그가 임의로 선택한 공간에 붉은색 페인트를 칠한다. 붉은색은 쉽게 지울 수 없는 선연한 기억이자 잊힐 위기에 처한 존재들이 보내는 구조의 신호이며, 한편으로는 철거 현장의 폭력성에 맞서는 위반의 상징이다. 이처럼 정지현은 흐릿한 기억을 사진으로 붙들어 두기 위해 연연해하지도, 재개발 현장이 가지는 스펙터클함을 시각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물이 되어 버린 콘크리트 덩어리 위에 도발적이고 직접적으로 여기에 삶이 있었노라고 강한 표식을 남길 뿐이다. 이것은 재개발이 묵인되고 남용되는 도시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자신만의 퍼포먼스이자 작가적 수행이다. 그의 붉은색 페인트칠은 섬세하게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반영하듯 거칠고 투박해서 쫓기는 사람의 붓질처럼 불안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밤에 철거 현장을 찾아가는 일은 작가에게 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현실적으로 이 작업은 철거 현장에서 인부들이 모두 떠난 밤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밤은 모든 동력이 끊긴, 말하자면 햇빛마저도 차단되어 버린 시간이다. 철거 현장은 전기며 수도는 물론이고 아무런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공간이 박제되어 버린,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소멸하는 사물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밤에 철거 현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억과 흔적을 보듬지 않는 사회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균열을 내는 모종의 수행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철거 현장에서 펼치는 이 작업은 도무지 수월할 수가 없다. 일단 붉은색으로 칠한 공간을 내부에서 촬영한 뒤, 그 내부가 어떻게 소멸해 가는가를 건물 밖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다. 철거 현장의 일정을 조율할 수도 없기에 그 공간의 안녕은 오로지 지속적인 방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며칠에 걸쳐 조금씩 공간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칠을 해 둔 바로 다음 날 폭파되어 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는 마치 조난당한 생명을 찾아내는 것처럼 랜턴에 의지해 아주 작은 조각으로 쪼개져 버린 붉은 방의 흔적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조난당한 흔적들을 정지현은 오로지 가로등이나 달빛처럼 주변의 빛에만 의지해 장노출로 포착한다. 미동도 하지 않는 붉은 방과는 대조적으로 사진 속 밤하늘에서는 별빛이 흐르기도 하고, 철거 현장 밖의 나무들은 바람에 몸을 흔들기도 한다. 심지어 철거 현장 저 멀리 아직은 건재한 주택가의 불빛들은 찬란하기까지 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붉은색,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은 그러니까 얼룩 같은 것이다. 곧 사라질 그러나 분명 우리에게 찾아왔던 존재의 얼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