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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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
































© 2021. Jihyun Jung
photojh@hanmail.net






빨강(들)을 찾아서
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0. 사진속의 빨강은 예쁘고 고운 빨강이 아니다. 어둠을 담은 빨강. 부서진 유리창, 허물어진 벽, 이제 곧 그 누구도 그 방을, 그 건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 빨강을 보았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1. 어떤 밤. 정지현은 철거명령이 떨어진 음습하고 흉흉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하나를 찾아서 방을 온통 빨강색으로 칠했다. 이제 빨강을 담기 위해 카메라의 렌즈를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온전히 빨강을 담으려면, 시간을 담아야 한다. 아득한 어둠 속에 있는 희미한 빛이 빨강을 담아 낼 때까지.
그 밤이 지난 후, 또 다른 기다림의 시간이 정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거는 언제나 순식간에 일어나기에 매일매일 빨강이 있는 그 곳으로 갔다. 건물과 그만이 알고 있는 빨강의 기억. 어느 날, 커다란 쇠뭉치에 속절없이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나서야, 건물 안에 갇혀 있던 빨강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우리도 산산이 부서지고 파편화된 빨강 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주 잠시. 정지현은 그 빨강이 세상에서 흔정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렌즈를 열고 셔터를 눌렀다.

2. 정지현의 사진은 종종 ‘도시화’, ‘재개발’이라는 키워드로 읽힌다. 작가도 이야기하듯 그의 사진은 분명 올망졸망한 골목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고 일어나면 아파트단지 같은 것들이 생겨나는 개발을 향해 달음질치는 ‘도시화’와 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도시’, ‘개발’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둬두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사진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사진들에는 렌즈에 포착된 사태(상황)에 대한 작가적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개발이나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분노, 혹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쫒겨난 사람들에 대한 연민. 어느 쪽이던 이런 류의 사진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감적이입을 끌어낸다. 그렇게 흔하게 철거현장을 다룬 사진 속에서 흔히 보이는 신발 한 짝이나 삐뚤어진 액자를 보아왔는데, 정지현에 사진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곳에 있던 누군가들의 자취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없다.

그냥 빨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지현의 사진을 꼼꼼히 보고 있노라면 일반적인 감정이입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래도 될까싶을 정도의 거리두기. 장소와 공간이 가지고 있었던 ‘이야기’는 삭제되고 시각적 이미지만 남는다. 그리고 사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프로세스를 상상하게 되고 사진 안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에 집중하게 된다. 마치 영화의 세트장면을 바라보는 듯한 건조해진 마음으로 사진을 본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주제는 사회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이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 뽕밭으로 유명했다던 잠실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물론 정지현에게 뽕밭이었던 잠실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정지현에게 잠실은 아파트단지였다. 아파트 키드, 그는 처음부터 도시의 아이였다. 성냥갑처럼 줄선 아파트 단지와 콘크리트가 뽕밭보다 자연스러운 세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원할 것 같은 아파트 단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시는 그렇게 변화한다. 순식간에 건물들이 파괴되고, 더 거대한 무엇인가가 들어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정지현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잠실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진 재개발은 어느 허름한 달동네나 뒷골목의 재개발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미 도시였던 곳에서의 변화는 좀 덜 처절하다. 그곳에는 또다시 삶을 터전을 찾아나설 여력이 없는 이들의 질척한 삶의 모습은 없다. 사람들은 무심히 떠나고, 그 자리에 당영하다는 듯 들어서는 또 다른 어떤 상징적인 거대한 건축물이 등장했을 뿐이다. 정지현이 철거나 재개발은 다소 ‘무심한 듯’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그렇게 아파트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아파트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그 아파트 단지가 사라졌던 것처럼, 지금 볼 수 있는 아파트들도 언젠가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에 마치 아파트의 초상사진을 찍듯 그렇게 아파트를 담았다. 건(축)물과 기억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 그의 시선이 옮겨간 것은 건축 중인 건물의 내부였다. 이제 곧 멋진 인테리어자재들로 마감되어 누구도 볼 수 없게 될 건물의 내부. 거친 콘크리트 벽에 기하학적인 공간이미지들을 찍었다. 허물어질 운명은 아니었으나 건축의 중간과정이기에 영원할 수 없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기록, 그것은 여전히 기억에 대한 이야기였다.

5. 정지현의 ‘빨강’은 기억에 대한 빨강이다. 사라져가는 아파트, 완공되면 볼 수 없는 건설현장에서 건축물의 내부. 어떤 감정이입 없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증. 그래서 관객은 사진이 보여주는 현장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보다 사진 이미지 자체에 몰입할 수 있다.

6. 그러고 보면 확실히 그의 개개의 사진 속 현장들의 이야기를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많은 내용과 갈등이 내재하는 상황에 대한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스펙타클한 철거현장의 장면을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다. 마치 특수효과를 준 것과 같은 조명, 힘없이 무너져가면서 콘크리트들을 뱉어내고 있는 듯 보이는 허물어져가는 건물, 그 안에서 주인공처럼 드러나는 빨간 방. 고무줄처럼 늘어져 있는 철근들은 수직의 건물과 허물어진 콘크리트의 잔해들과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묘한 콘트라스트. 정지현이 작업을 진행하는 프로세스를 알고  나서는 폐허의 현장 안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빨강의 흔적을 찾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7. 그런가 하면 정지현의 ‘빨강’은 퍼포먼스에 대한 빨강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이 흥미로운 지점은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 속 현장에 그가 있었다는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저 있는 대상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가 주어진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행위를 통해 상황을 설정하고, 그 설정에 의한 결과를 기록했다. 때문에 가끔은 그의 사진을 ‘정통 사진’(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의 범주에 넣기 주저하는 경우를 보게 되지만, 이 같은 특징은 그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진의 확장가능성에 대한 실험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의 ‘빨강 찾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