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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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위한 예외상태의 장소들
정현 미술비평


“ ‘발전’은 다른 신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동인이 되어버렸다.”
-  질베르 리스트,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봄날의 책, 2007, 302쪽

예외상태의 장소
발전은 성장을 담보하는가? 이 거대한 질문은 국가 주도의 개발 사업을 기반으로 한 이익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한 명제처럼 들린다. 최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는 기계 문명의 고도 발전에 의해 자연 생태계가 무너진 미래 지구가 배경이다. 생태계의 파괴는 지구의 운명이 끝났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개척지를 찾기 위한 우주 탐험에 나선다는 게 영화 줄거리의 중심축이다. 지구가 맞이한 재난의 이면에는 가혹할 정도의 토지 개발과 노동 착취, 유전자 조작에 의한 식품의 대량 생산 등 자연과 문명의 끝나지 않는 경쟁이 있다. 과연 인류는 소진된 지구를 대신할 식민지 혹성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는 새로운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관적 종말론으로 치닫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마지막 가능성이 출현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한다. 이른바 구원의 메시지인데, 그것이 바로 인류애이고 사랑이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발전이 역사의 동인이 되었다는 리스트의 말처럼 인간은 더 나은 삶의 조건과 환경을 추구하고 이를 기념한다. 발전은 의외의 곳에서조차 불현듯 나타난다. 세상이 21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가정의 영화 (세상의 끝까지 21일, Seeking a Friend the End of the World(원제))에서는 지구의 종말을 대비한 보험 상품을 소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도시는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법과 질서는 완전히 무시된다. 예외상태는 어디에서나 불쑥 나타난다. 최근만해도 도처에서 일어난 국가적 차원의 사고들은 일시적으로 예외상태의 시공간을 창출한다. 지구 종말론과 지구 개발론이 대칭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보험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기획한다. 노화, 질병, 교육 등과 관련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보험 상품은 미래의 안정을 보장하는 헤테로토피아는 또 다른 측면의 발전이다. 예외상태는 새로운 법, 규범, 상품을 생산하는 발전의 조건이 된다. 과연 발전은 인류의 성장과 미래를 담보하는가? 발전이란 유토피아는 완벽한 미래라는 환상을 파는 기제일 수 있다. 리스트는 발전을 “사회진화론(선진국 따라잡기), 개인중심주의(인간의 인격 개발), 경제주의(성장과 보다 많은 소득 획득)”[1]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발전은 어디에나 있다. 성형, 다이어트, 인테리어, 패션, 외국어, 스팩에 이르기까지 발전 이상주의는 자아와 세계가 만나는 곳 어디에서나 나타나며 타자와의 비교에 의해 산출되는 자의식과 같다.  심지어 개인이 갖는 자기 계발조차 사회진화론, 개인중심주의 그리고 성과사회에서의 경쟁력을 보여주기 위한 사회적 보험 장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범위를 조금 넓혀보자.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국가의 의지는 예외적 상황을 제시한다. 새로운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국가적 사업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예외상태를 통해 적극적으로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상시화된 예외상태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당동, 아현동, 길음동, 용산 재개발, 제주 강정마을, 새만금, 4대강 사업 등은 선진국형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국가 주도 사업이다. 1980년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이 중산층을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면 2000년 이후의 도시개발은 불안정한 중산층의 외형만 부풀리게 하는 기제가 되어 잠정적으로 이러한 계층을 중산층으로 흡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80년대 초에 태어난 아파트 키드들이 자신들이 살던 터전이 붕괴되고 재탄생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흥미롭게 국가 주도의 개발 문제를 다루는 작가들이 창작 전 분야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사진 작가 정지현도 이러한 작가군 중 한 명이다.  최근 이 같은 현상을 반영한 시각예술작업들은 현장을 보고하는 기록에 집중되어 있다.


예외상태에 개입하기
서양의 플라톤 사상은 건축에의 의지를 이상의 실현과 연결시켰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서구 사상과 건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사상의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새로운 건축을 세우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는데, 그리스인들에게 건축이란 단순히 장인의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의미를 지녔다. 건축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는 장인들이 기술자라기보다 지식을 이용해 사상을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지휘자와 같은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은 생각을 현실로 구현하는 제작 과정과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건축은 결과물로서의 도시의 외피가 아니라 시대적 사상의 구조물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이 개발이란 명분을 바탕으로 무차별하게 파괴되고 그 자리 위에 전보다 웅장하고 세련된 건축을 세우기를 반복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고진이 언급한 그리스 건축에 대한 논지는 분명히 서구 사상이 형식주의 모더니즘으로 재생산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이른바 ‘해체주의’로 발현되었다. 그러나 개발을 위한 건설 정책은 형식주의의 비판과는 무관하게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중이다.

정지현 사진은 언뜻 보면 개발을 위해 시행되는 건축물과 파괴 중인 익명의 건물을 기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현장 보고를 위한 기록사진이라기보다 건물 안으로 파고 들어가 그 속에 남겨진 잔해와 파편을 응시한다. Demolition Site는 일시적으로 예외상태가 된 장소들, 잠실, 인천의 재개발 지역의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사장이나 재개발 지역은 탈영토화된 지역이다. 정지현은 장소의 기억을 되살리지도 않고 지역의 성격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는 파괴가 진행 중인 사건 현장을 취조하듯 공간 내·외부를 기록한다. 이 과정은 개발을 위한 파괴라는 사회학적 비평 이전에 작가에게는 ‘남겨진 것’을 만나는 기회이다. 이 기회는 시대의 사상이 담긴 건축의 구조, 구성요소, 물질 등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개발 사업은 사상으로서의 건축의 가치를 허락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개발의 논리는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라는 낭만적 유토피아만을 추구하기에 과거의 산물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연민은 그리 크지 않다. 역사박물관 안에 유물로 남겨두는 걸로 윤리적 보상은 마무리되는 게 일반적이다. 정지현은 갑자기 사라진 장소에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대신 남겨진 것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묻는다. 과연 이곳에 존재하던 건물, 기억은 버려져도 되는 것인가라고. 그는 곧 사라질 건물 내부로 들어가 일부 공간을 빨간색으로 칠해 표식을 남긴 후 이 광경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이 표식은 작가가 남겨진 것 안과 밖을 연결하는 장치이자 사진가로서의 그의 태도를 반영한다. 사진가는 어쩔 수 없이 객관적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과 적극적으로 사건 안으로 침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정지현에게 ‘빨간 표식’은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이자 사진가로서의 진지한 물음을 반영한다. 과연 사진가가 대상에 얼마큼 개입해도 되는 것일까? 현대사진에서 이 같은 물음은 이미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지의 원 정보를 작가의 의지와 필요에 맞추어 지우고 덧붙이고 자르는데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굳이 정지현이 파괴 중인 혹은 건설 중인 건물의 내부로 잠입해 작가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을 남기려는 행위는 위기에 놓인 현장의 상황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르포 사진의 성격과는 충돌하는 지점이다. 1995년 벨기에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ys)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구멍이 뚫린 청색페인트를 들고 도시 이곳저곳을 배회한 작업이 있었다. 그의 이 같은 어슬렁거림은 도시 바닥 위에 얼룩을 남긴다. 얼룩 자체는 기호학적으로 어떤 지시나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시적 몸짓’이라 불렀다. 작가는 사진의 대상이자 곧 사회문화적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내부로 잠입해 색을 칠한 후 이 장소를 사진으로 포착함으로써 덧없이 스러지기 직전의 건물과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이 같은 적극적 개입 과정은 결과적으로 정지현 사진이 단순히 도시개발의 과정을 기록하는 사진가가 아닌 건물, 장소, 폐허와 어떻게 교감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소멸과 생성 사이
정지현은 공간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추적하고, 이 과정 중에 발견한 의미가 없는 잔해들을 주목한다(Construction Site). 그가 발견한 것들은 낡은 콘크리트 잔해, 건축 내부에 채워졌던 부산물, 철조 구조물 등인데,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아닌 건물이 살았던 기억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파편들은 마치 조각이나 설치미술 혹은 회화적 뉘앙스를 풍기는 사진으로 재해석된다. 최근 전시에서 정지현은 인화가 아닌 실제 비율로 실사 출력을 해 의도적으로 사진의 해상도와 심도를 떨어뜨려 마치 평면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 설치작업을 제시한다(Red room). 젊은 사진작가로서 정지현은 짧은 기간 동안 공사장이나 재개발 지역을 찍는 도시 유형학적 사진작가로 굳혀졌다. 그러나 위 작업은 그의 작업이 어떻게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예이다. 그 이유는 이 작업을 통해 정지현은 오브제로서의 사진을 과감히 버리고 전시 공간을 이용해 유사한 대상을 낯설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직 소개하지 않은 작업 가운데 강원도 철원에서 매해 겨울철에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그가 사진기를 매개로 어떻게 대상, 세계를 관찰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진행형 프로젝트는 대자연의 에너지가 어떻게 풍경을 생성하는지를 관조하는 작업이다. 사실 정지현의 작업에는 언제나 시적 감응이 담겨 있었다. 낡은 건축 구조물을 공사장 내부에 설치해 기능을 위해 제작된 형태가 어떻게 존재감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정지현을 대화하는 사진가로 생각한다. 그는 소멸 중인 공간 속에서 새로운 생성을 찾아내고 생성 중인 공간 속에서 불안의 요소를 사진 안에 담는다. 그의 사진은 사람에게 말을 걸기보다 응시를 유도한다. 결국 예술은 보이는 것을 더 잘 보이게 하는 기술이라기보다 늘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게 하는 행위일 것이다.

[1] 질베르 리스트, 같은 책, 42쪽